# 모든 재산 국가 귀속··· 봉급생활자로 떠돌아

1942년 미드웨이 해전에서의 패배, 1943년 뉴기니의 부나 전투, 솔로몬 군도와 과달카날 패전,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죽음, 이탈리아의 패배 등으로 1944년 1월에는 해군 대다수와 관리 상당수가 패전을 수긍합니다. 배후에서 활동 중이던 중견 정치인들이 출현하여 종전 방법에 대한 청사진을 짜기 시작합니다. 

1944년 6월 일본에게 엄중한 의미가 있던 사이판이 공격받고 1주 뒤 가미카제식 날으는 폭탄을 개발하라는 명령이 처음으로 하달되고, 사이판에 거주하는 일본 민간인에게는 전사한 군인들 뒤를 따라 영광스러운 길을 가라는 황궁발 지시문이 전해집니다. 결과는 모두 절벽에서 투신하고 미군은 이를 필름에 담습니다.

사이판 전투 도중 교활한 의미에서 수상 <도조 히데키>의 사임이 말려집니다. 과거 4년 동안 일어났던 일에 대해 천황이 책임을 지지 않게 하기 위해, <도조>°가 현직에 있으면 그의 몫이 되어 희생양을 만들 수 있지만 내각이 교체되면 황실로 전가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죠. 

중견 정치인들이 수 많은 일본 군인들과 국민들이 죽어가는 상황임에도 몇 개월에 걸쳐 상의한 결과,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황실을 보존하기 위해서 <히로히토>가 어떤 종류의 책임억서도 보호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그래서 패전 13개월 전인 1944년 7월 천황이 국민들의 의미 없는 희생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는 점을 내세워 종전을 발표하는 방법을  <미카사> 왕자가 전합니다.당연히 히로히토는 왕자들이 국사에 관여할 권리가 없다고 격노했고, 특히 친동생 <다카마쓰> 왕자의 의견 개진에 화를 냈다 합니다.

1944년 8월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던 미얀마에서의 희대의 바보 지휘관 <무타구치 렌야>가 지휘하는 부대가 몰살을 합니다. 그럼에도 미적거리고 1년을 미루다 항복을 합니다. '도쿄대공습' 등 피할 수 있었던 수 많은 아픔들을 겪고, 원자폭탄을 먼저 개발하기 위해 사활을 걸지만 실패하고 도리어 두 발을 세계 유이하게 맞고 손듭니다. 늦게 든 손 때문에 죽어간 수 많은 생명에 대해서 단 한순간이라도 생각한 적이 있는 증거가 없습니다.

종전 연설문 전문이  끝에 실려있는데 항복 문서로는 참 애매하게 쓰여 있습니다. 일본식 어법이겠지만 항복의 표현도 참 난해합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목숨을 건져 1951년 입헌 군주가 됩니다. 천황 소유의 재산들은 모두 국가에 귀속되고 봉급생활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세계를 돌아다니며 오래도 살아갑니다.

줄이고 줄였음에도 긴 리뷰를 하게된 동인은 그가 일본 국민들에게 미친 영향이 너무 크고 영향이 제각각이어서 입니다.  천황제의 부활을 부르짖고 할복한 돌아이 <미시마 유키오>, 해군 타입 가미카제 중대장이었다가 출격 예정일이 광복절이라 살아난  <시마오 도시오>, 그리고 전함 야마토의 쌍둥이 전함이던 '무사시'를 탔다가 유일하게 생존한 <와타나베 키요시>를 각각 소개하고 싶습니다. 미리 <히로히토>가 소개되어야 해서죠. 그때 생략한 내용 일부가 등장함도 말씀드립니다. <끝>

/박정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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