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령지시자와 복종자 사이의 잔혹한 권력관계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復讐의 얼굴로 그것은 나를 기묘한 정체 속으로 떠밀었다. 칭칭 휘감긴 용수철이 풀리지 않고 목적을 상실하고 내팽개쳐지면 멍든 권태가 온몸에 퍼져 어디에도 쏟을 곳 없는 불만이 몸 속을 휘젖고 다닌다. 모순된 초조임에 틀림없지만, 몸은 죽음에 다다르는 노정에서 잠시 일탈한 것을 기뻐하고 있는데, 마음은 온통 채워지지 않는 생각뿐이다.'

'가차없이 태양이 다시 뜨면 이제 그것을 되돌릴 수는 없고, 아무것도 수행하지 못하고 밤을 새웠다는 후회와 반성 때문에 몸에 가득 찬 난폭한 기분으로 치닫는 것을 막을 길이 없다. 그래도 폭발시키는 것이 주저되어 속으로 억누르면 스르르 잠이 왔다. 우리들은 발진하지 않으면 달리 용도가 없는 일개 대원에 불과하다. 일상은 사소한 행동의 묶음이 되어 바짝 다가와 조금이라도 등한시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지만, 그 어느 하나도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은 여분의 부록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무의미한 뺄셈이기 때문에 생과 사의 구획점이 너무 부풀어 올라 내 죽음의 완결은 아름다움을 상실한다. 그러나 이쪽의 생에 남겨져 있다는 사실을 다시 고칠 수는 없고, 이미 퇴색된 낡아빠진 일상을 반복해야만 한다.'

이 대목에 오면 차라리 출진의 시간이 어서 왔으면 하는 상태에 놓입니다. 출진명령을 받고 장비를 갖춘 상태로 무한 대기 상태에서 오는 심리적 절망이 오히려 어서 산화되는 쪽으로라도 결말이 빨리 났으면 하는 것입니다. 제가 그 상황이었다면 아마 견디기 어려웠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작가와 그의 부대원들은 일본 사회 특유의 세뇌 때문인지 겪어내는 대목입니다. 1년여를 날마다 죽는 연습을 했기 때문일까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가족과 나라를 위해서 부딪쳐보자."는 자율성이 아니라 "천황폐하만세"라는 지독한 억압이 통한다는 것은 인간의 마음을 어디까지 통제할 수 있는 것일까요?

'미리 예정되었된 행동이 연기되자 일상의 모든 영위가 되살아난다. 내가 혐오하는 죽음이 발길을 돌려 멀어지고 피부 밑에서 꿈틀거리는 생의 근질거림이 발동하기 시작하여 前後의 약속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안다. 거대한 죽음에 직면한 바로 그 다음에도 잠은 나를 엄습하여 공복이 채워지기를 원하는 결핍의 표정을 숨기지 않고 방문해 온다. 이제 곧 죽는다는 이유로 수면과 식욕을 유예할 수 없는 것을 나를 허무 속으로 밀어넣는다. 그래도 몸속 깊숙한 곳에 희미하게 퍼져있는 몽롱한 안개 같은 빛의 장막은 무엇일까. 생을 차갑게 에워싸고 꽉 막고 있던 결빙의 표면에 어디선가 해빙의 물결이 밀려온다. 그 해빙의 물결을 거스르면서 결국은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는 발진 호령을 기다리는 것은 초조한 기분을 불러일으켰다. 그 초조함 속에서 위험한 낭떠러지를 걸으며 길가 풀덤불의 양지쪽에 앉아 오후의 태양을 즐기고 싶다는 생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이 나를 그런 생각에 빠져 들게 하는지 모르겠다.'

'출격의 그날을 두려움에 떨면서 빨리 오기를 바라고, 그것이 그 기대대로 확실히 찾아온 것인데 불발인 채로 계속 기다리고 있으니까. 모든 생의 영위가 지금의 나에게는 억겁이 되어 양팔에서 힘이 빠져 나가 체온은 차게 내려간 것 같다.'

'어떤 책임에서도 모두 달아나고 싶었다고 생각하지만, 새로운 세계의 질서를 확인할 방법도 없고 결심도 서지 않는다. 나의 초조함의 바깥쪽에서 예전 그대로의 세계는 무거운 표정으로 조금도 주춤하지 않고 움직이고 있으니까.'

작가의 공포는 명령불복종이 초래할 집단에서의 격리가 생명을 잃는 것보다 더 큰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이라는 사회의 폐쇄성이 부당한 명령을 수행할 수 밖에 없게 내모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곳에서 생활해보지 않은 외부인의 시선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명령을 내리는 자와 받아들여야만 하는 자 사이의 잔혹한 권력 관계를 보자면, 그 억압의 강도가 생명을 앗아가는 것까지 손쉽게 가능한 것이 일본이라는 나라로 여겨집니다. 당시 일본에서 촉망받던 제국대학 졸업자들마저도 불복종의 자의식을 조금도 표현할 수 없던 당시의 상황을 짐작해보면 <히로히토>의 죄는..ㅎ <끝>

/박정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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