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선주 '그늘마저 나간 집으로 갔다'

스스로 돌보는 새로운 삶의 방식
삶의 이력과 일상적 경험의 확장

고선주 시인의 시집 ‘그늘마저 나간 집으로 갔다’를 읽으면 우리 삶의 상처와 결핍을 치유할 가능성을 어떻게 모색할 것인지 질문이 생긴다.

삶이 지향하는 어떤 방향성을 통해 탐구해볼 수 있지만 고선주 시인의 시가 언어화한 삶의 양태는 좌절과 절망 속에서 굴절된 정서적 풍경만큼이나 무겁기만 해 향방은커녕 스스로를 돌보는 마음을 붙잡기에도 버겁다.

그렇다고 우리의 삶이 세속적 욕망에 찌들어 현실적인 삶과 괴리된 허위를 사는 것이 아님에도 그저 남들처럼 혹은 남들만큼 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마저 충족하기 어렵기만 하다.

이러한 간극을 경험해야 하는 상황은 지금 이곳의 개인이 세계로부터 얼마나 이탈되어 있는지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시인의 말에서 언급하였듯이 ‘삶이 물먹은 솜뭉치처럼 제 무게에 가라앉던 날’의 심란함으로 자신의 현실을 재현하는 시인의 시적 진술들은 외적 현실과 시적 주체의 내면이 갈등하는 삶의 스산한 풍경을 여실히 보여준다.

어찌보면 지극히 고백적인 언술들로 채워져 있는 것 같지만 자기 삶의 이력과 일상적 경험 그리고 그로부터 야기된 정서적 양태의 변화는 서정시가 지닌 주관성에서 보편적 정동으로 확장돼 맥락화된다.

이는 알다시피 서정시의 본질로 개인의 상처를 드러내 공명하게 함으로써 세계가 강제하는 부조리를 깨닫게 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점을 간과한다면 시가 자칫 자신의 처지를 비판하는 감정적 언술로 치부될 위험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서정이 지닌 익숙함과 이해 가능한 세계로 회귀해 사유하려는 안정에의 욕망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서정은 인간의 정서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야기하는 세계를 향해 언어화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서정의 익숙함과 안정은 역설적으로 삶의 익숙함과 안정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에 대한 사유와 그것을 묘파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신자유주의적 성과 주체를 요구하는 사회에서 남과 더불어 결을 나누며 어우러지는 곡선의 삶은 우리가 지향하고자 하는 삶은 될지언정 현실적 심상자리에는 자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병국 시인은 “고선주 시인이 시로 언어화해 펼쳐 보이는 서정은 이 불편한 간극을 인지하게 돼 우리 삶의 균열을 보편적 공감의 영역에서 가시화하는 데 의의를 지닌다”고 밝혔다.

고선주 시인은 “불면의 시간들, 포말처럼 흩어지는 기억들, 뜨겁거나 차갑거나 아무렇게 놓인 일상들, 삶이 물먹은 솜뭉치처럼 제 무게에 가라앉던 날, 꽃과 악수하는 법을 잊어버렸고, 밥알의 힘을 망각한 채 오후가 가지런한 이유마저 뭉클해졌다”며 “노트북 자판 앞 언어들이 심란한다. 긴 꿈에서 막 깨어났다”고 말했다.

1996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와 계간 ‘열린 시학’ 및 ‘시와 산문’ 등에 시와 평론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꽃과 악수하는 법’, ‘밥알의 힘’, ‘오후가 가지런한 이유’ 등을 냈다.

/조석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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