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동체 운명의식 '군국주의적 산화' 꿈꿔

어릴 때부터 작은 절의 주지스님이던 아버지에게 '금각사'를 절대미의 상징으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오다가, 스님으로서 절을 물려받을 지도 모르는 상태로 '금각사'에 들어가게 되는 말더듬이 소년이 주인공입니다. 작가 자신이 몸이 약해 2차대전 징병도 빠졌었던, 그 자신 컴플렉스로 여겼던, 개인사를 떠올리게 하는 결핍의 은유는 완전체로서의, 또는 무오류로서의 존재로 '금각사'가 자리잡습니다. 상징으로서의 '금각사'는 하나의 종교, 즉 神道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1890년대부터 '메이지 천황 부부'의 사진을 교실 칠판 위에 걸어 놓고 교육칙어를 공표하여 신앙화 했습니다. 신앙화되어진 국민들도 있었겠고, 분위기를 거역할수없어 겉으로 시늉만 한 이들도 있겠지요. 문제는 오류투성이인 인간을 神人으로 승격시키고 수직적 질서에 순응시키는 것은 봉건사회에서야 힘으로 누르니 가능한데, 근대화된 시민 시대에는 강력한 국뽕이라는 마취제가 필요한 것이죠. 이를 위해서 약소국을 정복전쟁하여 굴복시키고 약소국 국민들을 상대적 노예 상태로 전락시켜 일본국민들을 자동적인 신분 상승시키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다 아시다시피 대외적으로야 '대동아공영'이라는 자신들도 믿지 않는 슬로건을 내걸었습니다만.

소년이 곧 사망할 아버지와 함께 처음 보게 된 '금각사'는, 무로마치 막부 때 3대 쇼군이던 <아시카가 요시미츠> 시대에 만든 이후 500년이 넘은, 낡고 거무튀튀하며 초라한 3층 건물로 보입니다. 아름답기는커녕 부조화하고 불안정한 느낌마저 들어 그토록 아름다움을 기대했던 대상으로 배신당한 고통까지 느낍니다. 오히려 유리상자에 들어있는 모형이 꿈에 그리던 모양에 가깝게 여기기까지 합니다. 바꾸어 분석하면 절대미의 상징, 또는 숭배의 대상으로까지 여겨졌던 개체의 실존이 마치 십자가나 성모마리아상 같은 聖物이나 아이콘으로 대했을 때보다 볼품없다는 것이죠. 이는 '금각사'가 종교적 대상이었을 때 더욱 주인공을 사로잡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금각사'가 신화의 존재라거나, 기독교나 이슬람교처럼 숭배의 대상이 실체를 아무도 볼 수 없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신격화 또는 우상화되어야만 가치가 있다는 것이 작가의 견해로 보입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돌아와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금각사'를 보기 위해 다녀갑니다. 같은 공간에 있게 되어 기뻐합니다.

同性의 같은 학년 친구 <쓰루카와>를 만납니다. 주인공과 달리 토쿄의 유명 사찰 주지의 아들로서 밝은 면을 상징하는 인물로 보입니다. 이후 1944년 이후를 보내는데 미국 전폭기가 쿄토를 폭격하면, 주인공을 태워죽일 불이 '금각'도 같이 태워 없애리라는 생각에 깊게 도취됩니다. 큰 파국을, 인간적인 규모를 초월한 비극을, 인간도 물질도 추한 것도 아름다운 것도 깡그리 동일한 조건 아래서 말살해버릴 거대한 하늘의 압착기 같은 것을 꿈꾸는데 그런 파괴의 동경이 단순히 아름다움에 대한 지극한 관심이라고 주인공은 주장합니다. 하지만 맥락을 보면 '금각사'와 공동 운명체 의식, 즉 군국주의적 산화(散華)를 꿈꾸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는 몸이 약하여 어지간하면 다 되는 병역 검사에서 탈락하였지만 <미시마 유키오>의 본심은 전쟁터에 있었음을 드러냅니다. <계속>

/박정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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