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수·군산대 인문대학 사학과 교수
/김종수·군산대 인문대학 사학과 교수

새만금 해역에 위치한 고군산군도는 원래 군산도라고 불렸다.

‘고군산’이라는 명칭이 최초로 쓰인 것은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서이다.

『난중일기』 정유년(1597) 9월 21일자에 “아침 일찍 출발하여 고군산도에 도착하였다.”라고 쓰여 있다.

이순신 장군은 1597년 9월 16일, 12척의 전함으로 133척의 왜군을 무찌른 명량대첩 이후 즉시 군산도로 뱃머리를 돌렸다.

이것은 영의정 유성룡이 군산창에 있는 조세미가 일본군에게 탈취될 것을 우려하여 이순신 장군으로 하여금 군산의 안위를 살펴보게 하였기 때문이다.

이순신 장군이 군산도에 도착한 것은 명량해전 6일 후인 9월 21일이었다.

『난중일기』를 보면 이순신 장군은 군산도에 도착한 후 해전에서의 긴장이 풀어진 이후 연일 계속된 항해로 심한 몸살을 앓았다.

이순신 장군은 12일간 군산도를 순시하고 군산창의 안전을 확인한 후 떠났는데, 이후 노량해전에서 전사한다.

이와 같이 군산과 새만금 해역은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이 명량대첩을 거둔 후 쉴 틈도 없이 올라와 순시해야 할 정도로 전략상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고려시대에 군산도에는 군산진이 있었다.

여기에는 백여 명의 군사들이 주둔하여 해안 방어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려말 왜구의 침략 속에서 군산진은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특히 최무선 장군에 의해 500척의 왜선이 격파되는 진포대첩이 일어나기 직전, 이 왜구 선단이 거쳐 간 군산도에는 아무것도 남아나지 않았다.

이러한 상태는 조선전기 내내 지속되었다.

반면 조선 건국 이후 군산진은 육지로 옮겨가 군산에 설치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군산진이 옥구 북쪽 진포에 있다.”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군산진은 세종 이전부터 군산에 있었던 것 같다.

조선전기에 군산진은 서해에서 외적의 침략을 막는 해방의 임무와 아울러 군산창에 보관된 조세미를 한양으로 운송하는 조운의 임무를 맡고 있었다.

조선후기에 들어와 군산의 중요성은 더욱 부각되었다.

이것은 황당선의 출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 바다에 침범하는 중국 배를 황당선이라 하는데,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연해에서 불법 조업을 하고, 해안에 상륙하여 노략질을 자행하며, 공권력에 저항하였다.

광해군 원년(1609)에는 새만금 해역을 관할하는 군산포 만호가 해적에게 피살되었다.

그러자 광해군은 “국가의 큰 치욕이다.”라고 말하고 대책을 세우라고 지시하였다.

결국 조정에서는 군산진 하나로 국방과 조운을 모두 담당하는 것이 어려우니, 군산창 부근에 있는 군산진은 조운만 전담하고, 군산도에 별도의 수군진을 설치하여 해방을 전담케 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이후 인조 2년(1624)에 군산도에 수군진을 설치하고 이를 ‘고군산진’이라 불렀다.

군산진은 조운을, 그리고 고군산진은 해방을 담당하는데, 이곳을 관장하는 관리는 타 지역과 달리 많은 특전을 받았다.

군산진의 첨사는 2년간의 조운 업무를 무사히 완수하면 종2품 방어사로 2계급 특진되었다.

그리고 고군산진 첨사 역시 특별대우를 받았다.

고군산진은 전라 우수영으로부터 어떠한 간섭도 받지 않는 ‘독진’으로 승격되었다.

이에 따라 고군산진 옆에 있던 만경, 무장, 부안 등의 현령은 고군산의 지휘·감독을 받아야 했다.

오늘날 고군산군도가 만경현에 속해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만경현이 고군산의 지휘·감독을 받았다.

종3품 첨사가 다스리던 고군산진이 종5품 현령이 다스리는 만경현에 속해 있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최근 김제시의 일부 인사들이 고려부터 조선시대까지 1,200년 동안 고군산군도가 만경현에 속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전혀 역사적 근거가 없다.

고군산군도는 그 명칭에서 보듯이 군산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군산도에 있던 군산진이 새만금 해역을 관할하였고, 조선전기에는 군산에 있던 군산진이 새만금 해역과 고군산군도를 관할하였다.

그리고 조선후기에는 군산의 군산진과 고군산도의 고군산진으로 각각 나뉘어 각각 조운과 해방을 담당하였다.

군산과 고군산의 명칭이 아무렇게나 생긴 것이 아니다.

역사적 관련성으로 인해 그 명칭이 함께 600년 이상 쓰인 것이다.

/김종수·군산대 인문대학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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