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길선 전북대 고분자나노공학과 교수
/강길선 전북대 고분자나노공학과 교수

매년 새 학기가 오면 대학생 새내기를 맞는 기쁨과 동시에 한 학년을 올라가서 새로운 마음으로 만나는 첫 시간이 너무 좋다.

또랑또랑하고 초롱한 눈빛을 마주치는 것 또한 기쁘다.

이러한 기분이 4년 졸업 때까지 지속됐으면 한다.

새로운 학기도 거의 30년이 돼가니 교육현장에서 오래됐다.

30대 후반, 처음에는 학생들과 나이 차이도 얼마 나질 않았었다.

이제는 내 막내아이보다 더 어린아이들을 맞이해 젊은 청춘들과 즐기는 호사를 누리고 있다.

교수는 이렇게 학부학생들 강의와 함께 대학원생들과의 연구를 병행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미국 주립대학 이공대교수의 강의와 연구의 비율은 45:55정도로 수행한다.

강의에 소질이 없거나, 강의하기 싫은 교수들은 연구만을 할 수 있다.

연구 프로젝트가 없거나 본인 연구분야가 프로젝트화하기에 어려우면 강의교수만 해도 된다.

물론 월급에 있어서 차등이 난다.

강의 비율이 45%라 함은 1년에 3과목 정도 즉 두 학기에 3과목이 제일 적당하다.

(한 과목당 15%를 친다)강의만 하는 경우에는 1년에 6과목 즉, 한 학기에 3과목을 강의한다.

연구는 이공대학 교수의 필수이다.

본인의 연구주제를 논문화(publish)하고 특허(patent)를 내고 이를 바탕으로 연구제안서(proposal)를 제출하는 3P가 필수적이다.

동료 연구자들보다도 경쟁적 우월성을 점하면 연구비가 확보되고, 석박사를 배출한다.

전문가를 양산해 국가산업과 사회 지속가능성을 제공해 본인의 능력을 확인하게 한다.

경제적으로 윤택하게 해 사회구성원으로서 훌륭한 가정을 구성하게 해준다.

외형적으로 이렇게 교육과 연구를 수행하지만 사실은 더더욱 기초적인 것이 ‘인성 교육’이다.

학부강의는 학생을 만나는 시간이 수업과 면담시간으로 한정돼 있다.

석·박사 과정생들과 2~5년에 걸친 연구생활은 매일 동고동락해 평생 본인들의 부모하고 생활한 시간보다도 더 많은 시·공간을 생활한다.

이것이 도제(徒弟)시스템 생활이다.

육체적인 일과 동시에 창조적인 연구를 해야 된다.

실험실원들, 졸업한 선후배들 사이에 인간관계 또한 중요하기 때문에 사이가 좋으면 문제가 없으나 사이가 좋지 않을 때는 말 그대로 싸움이 난다.

일을 안 한다든지, 거짓말을 한다든지, 상식에 벗어나는 일들을 저지르면 정말 난감하다.

이래서 교수들도 감정 노동자에 속한다.

실험실내에 학생들이 많아지면 끊임없는 인내심을 요구한다.

어떤 때는 학생들이 교수들의 극한 인내심을 요구한다.

필자의 경우는 최근에 실험실내에서 불협화음이 들리던가 싶더니 급기야 쌍방 학생들한테서 명예훼손, 변호사 등의 이야기가 나오고야 말았다.

대낙담해 나 자신도 이 상황에 대해서 대폭발을 했다.

그러던 중, 최근에 정순신 변호사의 아들이 고교 재학 시절에 있었던 학폭 소송전의 전말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이와 같은 일들이 초·중·고·대학교 등에서 만연된 것을 알았다.

왜 이런 지경에 이르렀을까?학교는 남의 집 자식들을 모아놓고 서로 잘 되라고 교육시키는 곳이다.

교육시키는 곳에서 교육적으로 해결을 못하니 학교 외부에 잘잘못을 판단해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어찌해 교육계가 이렇게까지 됐는가?결국 참 스승에 의한 참 교육이 없기 때문이다.

법 없어도 살 수 있는 곳이 교육 현장이어야 하지 않나? 필자가 고교 시절인 1974~77년에는 한 반에 60~70명씩, 주·야간 20반, 한 학년에만 총 1,200~1,300여 명의 학우가 다녔었다.

남학생들이 생활하는 곳이니 항상 힘 겨루고, 시끄러운 일이 많았었지만 변호사 한번 부른 일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교내폭력도 다 학교 내에서 해결됐다.

교련·체육 선생님은 참으로 무서웠다.

웬만한 문제는 거의 이분들에 의해서 해결됐다.

해결의 기초에는 무섭기도 했지만, 그 이면에는 정말로 인간적인 분들이었다.

참으로 인간적이셨다.

90세가 넘으신 교련선생님 신현정 선생님과 3학년담임이셨던 영어선생님 윤재식 선생님과는 고교를 졸업한 지 46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연락드리고 가끔 만나 뵙고 있다.

사회도 변하고, 아이들도 변하고, 학부모들도 변하고, 세상도 변하고 있다.

그러나 교육의 최고 기초인 ‘인성 교육’에 있어서 참 스승에 의한 참 교육은 피할 수 없는 진리다.

그 옛날 학교가 그립다.

/강길선 전북대 고분자나노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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