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각'의 명령 정당화

 1년 여를 갈등 속에 지내는데 노사에게 실제로 자신의 악행이 있었는지를 사실대로 밝히는지의 여부가 문제일 뿐, 자신이 악행을 저질렀음을 참회하는 고민이 아닙니다. 밟았을 때 가학적인 성적 쾌감을 느끼는데 1년 정도를 당시의 쾌감에 지배당한 상태로 지냅니다. 주인공 또는 저자는 선악의 절대 기준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이는 특히 (일본) 우익들의 특징으로 보입니다. 세상이 거의 갑을 관계로 되는 경향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일본인들은 제어 장치가 거의 없는 편입니다.

막장을 보여줍니다. 일본의 선불교는 철학 수준은 결코 낮지 않으나 사람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사회적 가르침은 매우 열악합니다. 이는 제 한목숨 건사하기도 힘든 그들 사회의 피말리는 갈등이 원인으로 보입니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특징적으로 남을 거의 돕지 않잖아요. 갈등의 원인은 노사의 관심은 '금각'의 이름 아래 행해진 악행에 대한 도덕적 문제인지는 모르지만, '금각'의 명령이라고 정당화하려는 주인공의 심리에 있습니다. '금각'의 의도는 다 옳다고 믿거나 믿고 싶어하는..

대학을 진학하고는 장애인으로 안짱다리인 <가와사키>를 만납니다. 그에게 운명처럼 매료됩니다만 실제로는 주인공의 다른 일면, 즉 적극적인 면을 형상화한 것에 불과합니다. 장애인임을 도리어 여자를 유혹하는 무기로 사용하고, 타인의 시선 따위 시니컬한 냉소로 넘겨버리는 그는 소극적인 주인공 심리의 공격적 형상입니다.

<가와사키>의 능력으로 첫 여자 경험을 하게 되는 기회가 두 번이나 생기나, 그때마다 황홀할 정도로 선명한 '금각'의 형상이 나타나 성욕을 박탈합니다. 한 번은 평범한 하숙집 처녀였고 다른 한 번은 유산 경험이 있는 미모의 꽃꽂이 선생이었습니다만 모두 실패하고 두 여성에게 모멸감만 안겨줍니다. 젊은 청년에게 성욕을 빼앗을 수 있는 것은 죄의식이나 더한 지독한 아름다움, 즉 종교나 이념 외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여성의 裸身을 앞에 둔 두 번의 상황은 죄의식을 느낄 관계가 아니었으므로 '금각'에 매료된, 다시 말하면 이념에 홀린 상태입니다. 바로 군국주의에...

후반부에 속물적인 노사에게서 '금각'을 태워 나만의 것으로 만들겠다는 결심을 한 후에는 사창가 여성과도 잘도 관계합니다. '금각'을 없애고 나만의 금각을 다시 세우려하였든, 아예 세상에서 새로운 '금각' 자체를 세우려한 것입니다. 결심이 서자 창녀와도 관계할 수 있었다는 측면은 아니고 앞의 두 번의 기회에서 나타난 '금각'의 아름다움은 그토록 장엄했다는 강조로 보입니다.

이는 좌익 운동이 한창이던 1969년에, 도쿄대학에서 전공투 학생들과 작가만이 가진 맞장 토론에서 모든 쟁점에 서로 공감하는 자리가 만들어집니다. 모든 부문의 개혁의 필요성에 양측이 모두 동의했습니다만, 얼토당토않게 <미시마 유키오>는 시종일관 '천황제의 부활'을 부르짖었다 합니다.

1970년에 '천황제 부활'을 부르짖고 할복했을 때 <히로히토>가 매우 분개했다 합니다. <미시마 유키오>가 원하는 천황은 그의 모습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언잖았던 것입니다. '금각사'처럼 찬란히 빛나고 무오류인 천황을 꿈꾼 것이니 더 모멸감이 심했겠죠.

[금각사]는 군국주의에 대한 찬양 소설로 보입니다. <끝>

/박정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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