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문 전주남부교회 목사
/강태문 전주남부교회 목사

5월은 감사의 달로 어린이날, 어버이 날, 스승의 날이 한꺼번에 들어있다.

누구나 누군가의 부모이거나 자녀이고 제자이기 때문에 한 번쯤은 자신의 주변을 돌아보며 자신이 해야 할 도리에 대해 생각하는 달이기도 하다.

신문과 방송 역시 그 의미에 초점을 맞추기도 하는데 어쩌면 필자의 글이 때늦은 색 바랜 것이 될 것 같다.

‘군사부일체’는 통상 “임금과 스승과 부모의 은혜는 다 같다”라는 뜻으로 존경에 대한 의미로 이해하지만 이제는 이러한 말을 하면 고지식한 ‘꼰데’ 취급을 받을지 모르겠다.

시대의 현실이 그런 말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국가 최고 통치자로서 역대 대통령이 임기를 마칠 때 존경받는 대통령이 있었는가.

취임 초기에는 반짝 신뢰도가 올랐다가 임기 말에 이르면 부정평가가 높아져 존경받지 못한 대통령으로 전락한다.

더욱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은 그 말기가 불행했다.

물론 훗날 더 많은 세월이 흐르고 역사가 재평가되면 존경의 대상으로 떠오를 대통령이 나올지도 모르지만 아직은 없다.

스승은 없고, 교사만 있다는 말을 한다.

교육 현실을 개탄할 때 이런 표현을 쓴다.

과거 학교에서는 감동을 주는 스승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저 학교에서 지식만 가르치는 교사만 있다는 식이다.

스승의 사전적 의미는 ‘자기를 가르쳐서 인도하는 사람’이고 교사는 ‘학교에서 일정한 자격을 가지고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이기 때문에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스승과 교사를 구분한다.

원래 중국 당나라 때 쓰인 불교 서적에 “스승을 따라 걸어갈 때는 웃거나 떠들면 안 되고, 스승의 그림자를 밟지 않도록 일곱 자 남짓 떨어져야 한다”라는 내용이 있다.

물론 이제는 색바랜 말이 되어버렸지만...

교사의 그릇된 일탈 행위가 가끔씩 신문의 지면을 차지할 때 이제 교사는 지식전달자에 불과한 것인가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역으로 최근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와 교사노동조합연맹 같은 교원단체들은 면책권 도입을 요구하고 있다.

악의적인 아동학대 신고로 교사들이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고 교육과 생활지도도 위축된다는 이유에서다.

교총이 올 초 전국 유·초·중·고교 교원 5520명을 설문 조사한 결과 77%가 ‘아동학대로 신고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을 느낀다’고 답했다.

최근 몸무게가 또래 아이들의 절반인 7kg밖에 되지 않았던 31개월 여자아이가 영양실조와 뇌출혈로 병원에 실려 온 지 20분 만에 숨졌다.

여자아이의 동생인 17개월 남자아이도 제대로 먹지 못 해 건강이 악화한 상태로 집안에서 발견됐다.

아이들의 보호자인 친모 20대 A 씨와 계부 B 씨의 상습적인 방치와 학대 때문이었다.

이 사건뿐만 아니라 부모의 아동학대가 사회 분노를 일으킨 일이 자주 일어나 가슴을 절이게 한다.

최근 70대 아버지를 살해하고 아파트 지하 집수정에 유기한 혐의로 구속된 30대 김모(30)씨가 결국 범행을 시인했다.

서울 중랑경찰서는 지난 달 30일 존속살해·사체은닉 혐의를 받는 김씨가 “평상시 아버지로부터 잔소리를 듣는 등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고 밝혔다.

‘군사부일체’란 말이 무색해지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과학문명의 발달과 함께 공동체 생활의 합리적 개념이 상실되고 있다.

공동체는 일반적으로 공통의 생활공간에서 상호작용하며, 유대감을 공유하는 집단을 의미한다.

전통사회에서는 농업 생산을 위한 협동을 강화하고, 구성원들 간의 화합을 증진하기 위한 공동체적 규범이 발달했다.

과학문명의 발달로 점차 사람의 일을 기계화하면서 공동체는 분화되고 개인 위주로 발달 되어 현 사회를 포스트모던이즘 시대로 부르며 다원화 사회를 만들고 다양성과 차별성을 인정하게 된다.

문제의 해결이 상호대화를 통한 이해와 협력보다는 개성과 원칙에 따른 논리로 변했다.

개인 이기주의와 함께 디지털의 발달은 아날로그의 감성이 사라져 충동적 사회가 되어 아동학대, 묻지마 폭행, 학폭, 왕따, 집단이기심, 극단적 배타성 등이 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은 주변의 직·간접적인 도움을 통해 살아가는 존재이다.

즉 혼자 살 수 없는 사회인 것이다.

돈이 많아도 생산하는 사람이 없다면 살아갈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철저히 분화된 협력을 통해 살아가기 때문에 공동체의 한 일원으로 상호 협력을 이루며 살아가야 한다.

이기적인 생각을 버리고 공동체 중심이 될 때 안정된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강태문 전주남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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