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봉수 문학평론가·전북과미래연구소장
/한봉수 문학평론가·전북과미래연구소장

동학혁명의 역사적인 현장인 삼례와 대둔산은 당시 전주군에 포함된 지명이다.

1892년 11월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14개월 전, 동학교도들은 ‘동학교조신원운동’으로 전주군 삼례면에 모였다.

1864년에 사형을 당한 교주 최제우의 신원(정당함 인정)을 요구하며 모인 삼례집회가 실제 동학혁명이 출발하는 첫 결사 집회이었다.

이날은 전봉준이 창의문(倡義文)을 돌리며 역사에 등장한 날이다.

이 창의문이 바로 혁명을 여는 깃발이다.

들길의 불길처럼 번졌던 동학농민혁명군은 오로지 전라감영을 향하여 깃발을 들고 진격해 1894년 4월 27일(음) 전주성에 입성한다.

5월 8일(음) 전봉준은 전라감사 김학진과 화약을 맺고, 집강소를 각 군마다 설치하며 관민상화(官民相和)의 성공을 거둔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탈하자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관군과 합세해 삼례에 재집결하고 한양으로 진격한다.

분통하지만 일본군의 화기에 밀려 우금치 패전후에 전주군 고산 대둔산에서 최후 일전을 벌이고 전멸하다시피 한다.

이처럼 전주군은 혁명의 시작점이자 결실지이고 종결지이다.

전주에서 발의된 동학혁명의 정신과 정기는 도도히 흘러 일제에 맞서는 저항정신이 돼 3.1운동과 독립운동으로, 해방후에는 민주화운동의 모태가 돼 왔다.

이래서 완산주(전주와 완주 통합)는 한국의 정신이 뛰는 심장이라 할 수 있다.

전봉준장군의 최초 창의문(倡義文)은 삼례집회때 광화문복합상소 올리기 전 전라감사에게 먼저 보낸 글로서 동학농민혁명의 신호탄이 됐다.

창의문 내용이다.

수도는 오랑케 소굴이 됐다.

임진, 병자 치욕 어찌 잊으랴.

오백년 종사 망할 지경이고 인의예지와 효제충신 찾아볼 수 없다.

위태로움이 조석에 달려 우리 수만명이 왜적과 양적을 물리쳐 대보의 의리를 본받고자 한다.“그렇다.

동학혁명의 출발지인 삼례면이 바로 ‘전주군 삼례면’이라고 역사책에 기록돼야 한다.

동학농민운동은 전주군 삼례에서 결사하며 시작했고 그 힘으로 1894년 1월 고부와 무장에서 기포한다.

4월 전주성에 진격해 전주부 성안 전라감사와 폐정개혁안에 합의하는 전주화약(和約)을 맺는다.

전주는 농민혁명의 깃발을 가장 먼저 들었던 곳이고, 검가를 부르며 전라감영에 승리의 깃발을 꽂은 곳이 모두 전주군내에 있었다.

이후 일본군이 경복궁을 불법 점령하고 한반도를 유린하자 그 해 9월 다시 집결하고 항전불사를 외친 곳도 바로 전주군 삼례면에서 열린 ‘제2차 삼례집회’이었다.

또한 전주군 고산현 대둔산은 동학군의 최후 격전지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하나의 전주는 동학혁명의 시작과 완성과 끝이었던 것이다.

전주라는 지명은 이후 대한제국이 일본제국에 점령당할 때까지 완산주라는 이름과 번갈아 쓰이게 된다.

행정관리의 범위가 도단위로 넓혀지기도 하고 군단위로 좁혀 지더라도 현재의 전주와 완주는 백제이후 1400년동안 완전히 하나이었다.

특히 삼례는 전주의 관문으로 조선 최대의 찰방이었다.

일제는 호남을 수탈 일번지로 삼아 1935년에 급기야 ‘전주군’을 전주읍(시)과 완주군(완산주에서 ‘완’ 따옴)으로 강제로 분리한다.

백제 위덕왕때 555년부터 하나이었던 완산주(전주)가 일본에 의해 강제로 두 쪽으로 나뉜 뒤로 88년간의 세월이 흐르고 있다.

이후 전주는 하염없이 퇴보하고 전북은 뒷걸음쳐 왔던 것이다.

사실 전북이 지난해 12월 국회를 통하여 부여받은 ‘전북특별자치도’는 전국 초광역 개편 차원에서 표류된 전북도와 강원도에게 주어진 궁여지책의 이름, ‘강소권메가시티’ 의 행정적 지명이다.

어찌 되었든 지금은 변화의 골든타임이다.

진정한 완주와 전주의 통합은 숙명처럼 다시 다가왔다.

낙후된 전북도의 반등은 반쪽 전주와 반쪽 완주가 원형대로 하나가 되면서 부터이다.

전주와 완주가 하나가 됨으로써 이 땅이 동학농민혁명의 출발이고 완성이고 매듭이었슴이 설명된다.

이처럼 민족의 역사와 정신이 복원된다.

이뿐인가?두 시·군은 후백제 왕도(王都)로서 하나이었고 또한 조선의 본향으로서 민족의 역사와 정신이 이어진다.

어서 온전한 완산이 창조와 변혁의 땅으로 회복돼 지길 바란다.

동학혁명사상은 상생의 세상, 백성이 주인되는 자주정신,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정신에 기반한다.

이는 전주권에서 펼쳐졌던 정여립의 대동정신, 평등사상과 상통한다.

‘천하공물설’을 주장한 정여립은 신리에서 태어나 모악산에서 수양했으며 대동계를 이끌며 활동했던 무대가 전주의 지척인 금구이다.

임진왜란때 전주성을 결사 방어해 호남을 지켜낸 웅치와 이치도 당시 전주지명들이다.

모악산과 만경강이 왜 창조와 변혁의 성지이며 민족의 어머니 같은 산이요 강이겠는가?완산으로 통합한 ‘원형의 땅’이 다시 한번 호남의 중심이자 한국의 심장이 돼지길 소원한다.

/몽촌 한봉수 문학평론가, 전북과미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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