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욱 한국전통문화전당 본부장
/이영욱 한국전통문화전당 본부장

작년 5월 23일 전주시 서학동 흑석골에 전주천년한지관이 개관했다. 왜 서학동 흑석골에 건립이 되었을까?

서학동은 ‘돌이 반, 흙이 반’이라 해서 옛 지명으로 ‘반석리’라고 불리었고 ‘흑석골’이라는 명칭은 산자락에서 검은 돌이 많이 나오면서 불리어졌다고 한다. 흑석골은 동굴에서 시작된 풍부한 물줄기가 골짜기를 따라 큰 폭의 낙차를 만들며 전주천까지 흘러갔고 또한 보광재가 있는데 이 보광재는 옛날 완주군의 구이면과 임실에서 전주로 통하는 고갯길로써 물자를 이송하고 학교를 다니는 중요한 길이었다고 한다. 현재는 전주시에서 미래유산으로 지정하여 사라지지 않도록 그 흔적을 남겨놓고 있다.

흑석골이 한때 한지골로 명성을 드높일 때가 있었다. 해방 이후 흑석골에도 점진적으로 거주민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는데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인근 지역의 피난민과 이주민들까지 흑석골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그 중 지공들이 다수 있었다고 한다. 1950년대 당시 전국적으로 규모를 갖춘 제지공장이 많치 안았는데 흑석골에는 ‘전주제지’가 이전부터 한지를 생산하고 있었다. 이후 1960년대 제지산업이 급속도로 성장하였고 흑석골에 지공들이 모여들면서 중소규모의 한지생산 공장(가내수공업 포함)이 단지를 조성하게 되었고 ‘전주의 공업지대’라고 할 정도로 흑석골이 번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1980년 초반까지 청조제지, 문성제지, 문산제지, 호남제지 등 약 20~30여개의 한지공장들이 성업하였다. 당시 대한민국의 최대 규모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결과에는 지리적 환경이 큰 역할을 했다. 한지를 만들기 위한 주원료인 닥나무를 재배하는 임실이 인근에 있었으며 재배된 닥나무를 운송할 수 있는 보광재와 생산된 한지를 유통·판매할 수 있는 남부시장이 있었던 것이다. 또한 질 좋은 한지를 생산하는데 필요한 풍성한 물길이 골짜기를 따라 잘 형성되어 있어 한지를 생산하는데 최적의 환경이었던 것이다.

한국전통문화전당 전주천년한지관 돋음집 내용에 따면 “흑석골에서 흐르는 물은 pH7~9를 넘지 않은 중성을 유지하였기 때문에 양질의 한지생산에 적합했다고 한다. 종이가 누렇게 변색하는 이유는 산성 성질을 유지하기 때문인데 전통한지는 중성지의 성질을 띠어 오래 간다고 한다. 중성화가 종이 보존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유다. 즉 흑석골은 자연 굴에서 발원하는 풍부한 수량의 물, 경사진 지형으로 인해 생긴 큰 폭의 낙차, pH7~9를 넘지 않는 물의 맞춤한 성질 덕분에 전국 최대 최고의 한지를 생산 할 수 있었다.”라고 서술되어있다. 그러나, 전국 최대 규모의 한지생산지인 흑석골이 1980년대 시대의 흐름에 따라 환경에 관한 정부의 정책 그리고 1990년 후반에는 중국에서 저렴한 기계지가 대거 수입되면서 국내 한지생산업체들도 기계지를 생산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전통한지는 생산은 급감하고 그 자리를 잃어갔던 것이다. 또한 흑석골의 한지공장들은 전주시 팔복동에 산업단지 내로 대부분 자리를 옮겨야 했다. 이렇게 한때 흑석골이 아닌 한지골로 불리었던 명성은 사라지게 된 것이다.

전주천년한지관이 흑석골에 개관을 하면서 전통한지를 전통기법으로 생산하는 기술 및 소재(원료)연구를 주요업무로 하면서도 지역에 대한 애정 어린 마음으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닥무지 행사를 통해 ‘한지골’이라 불리어 던 시절 한지공장에서 근무하셨던 마을 주민들과 직접 닥무지 작업을 하며 작은 마을 축제를 열었다. 또한 주민들과의 소통을 통해 흑석골이 한지골로써 자리했던 스토리를 채집하고 알리기 위한 초석을 다지고 있다. 흑석골에 대한 새로운 큰 그림이 필요한 시점이라 생각된다. 우리나라를 대표했던 전통한지생산단지가 재조명 받고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우리 국민들이 찾고 세계인이 찾는 한지골로 다시 불리어지길 바란다.

/한국전통문화전당 본부장 이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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