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호분 가야토기-철제마구류 등 발굴
19분 국내 최초로 철제편자 발굴 장소
80여기 고분들 방향 동쪽향해 바라봐

장작으로 쌓은 성터 산중 터잡이
이천년 동안 마르지 않는우물
국내 유일 철제 도르래 발견돼

장수가야 유적발굴 역사-장소
방법 소개 흩어진 유적 한눈에

선사시대~현재 장수가야 전시
연말까지 삼고리 고분군 특별전

명절이 지나고 비가 한번 오고 나니 완전한 가을입니다. 가을. 장수 가는 길. 

이 가을 한복판을 달리는 길을 좀 많이 그리고 조금 오래 즐기고 싶었습니다. 고속도로를 버리고 옛날 국도로 달렸습니다. 터널도 없고, 신호도 있어 이 가을을 오롯이 느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또 한번의 가을이 왔고, 또 지나갑니다. 

진안을 지나 무주를 거쳐 장수로 가는 길은 데이빗 란츠의 피아노 음악과 참 잘 어울립니다. 그 길 자체가 가을입니다. 하늘은 정말 원래 ‘하늘색’ 같아 보입니다. 하늘에서 햇빛과 함께 피아노 소리가 내리는 듯 합니다. 너무 아름답습니다. 사진으로 담을 수 없는 분위기입니다. 

지난달 남원의 유곡리와 두곡리 가야 고분유적을 둘러보고 나서 ‘가야’와 우리나라의 고대사에 많은 관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전북 가야의 한복판으로 핸들을 돌렸습니다. 

그 첫 번째 관문은 장수 가야 홍보관이고, 그곳은 장수의 가을 하늘 아래 의암공원 한쪽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논개사당 호수 건너편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 장수 가야 유적답사의 핵심거점 장수가야 홍보관  

장수가야 홍보관은 박물관과 자료실의 중간 모습을 갖췄습니다. 이곳에서 장수 가야 유적 발굴의 역사와 장소, 방법 등을 알 수 있고, 흩어진 유적들을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장수가야 유적을 답사하기 전에 반드시 둘러보면 좋습니다. 

이 곳의 가장 큰 장점은 상주하고 있는 문화관광해설사 선생님으로부터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고, 또 궁금한 것들에 대해 물어 볼 수 있고, 답사 코스도 함께 선정 할 수 있습니다. 

찾아간 날도 선생님으로부터 장수 가야 유적이 처음 발견된 계기와 현재까지의 발굴 결과와 발굴된 유적, 그리고 발굴 장소와 그 곳을 어떻에 이어서 다닐 지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장수가야는 생각보다 오래전, 그러니까 ‘삼국시대’ 라는 말이 틀리고, 4국 시대 혹은 그 이상의 시대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에 근거해 200년 정도 고구려 백제 신라 3국 시대였을 때보다 가야가 함께 있었던, 합치면 약600년의 역사가 더 깊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아울러, 장수가야의 가장 큰 특징은 제철유적, 봉화, 산성, 고분 네 가지가 다른 가야 문명과 다르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옛날 장수 가야인들은 이렇게 고구려, 백제, 신라는 물론 낙동강 유역의 대가야, 금관가야 등 6 가야국과도 다른 면을 보이는 독립된 문화가 있는 나라였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사진자료, 영상자료는 물론, 관련 서적, 발굴된 유적과 거의 흡사한 모형까지 전시되어 있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초등학생부터 성인까지 모두 이해가 쉽도록 노력을 많이 한 정성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해설사 선생님의 조언에 따라 가장 가깝고 발굴 유적이 풍부하고 경치가 좋다고 소문난 유적맛집 동촌리 고분군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 능(陵)자리가 동쪽으로 향해 있는 까닭은? 장수가야 지배층의 가족묘 동촌리 고분군 

동촌리 고분군은 장수가야 홍보관에서 눈으로 보일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었습니다. 걸어서 10분, 차로 2분 정도 걸리는 거리입니다. 쉽게 설명하면 의암공원 장수누리파크 캠핑장 바로 뒷산입니다. 입구는 산 너머 왼쪽 길가에 있습니다.

조금 넓은 공터에 주차장과 화장실이 있고, 현수막이 있는 곳. 이곳이 동촌리 고분군으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입구는 주차장 오른쪽으로 나 있습니다. 길 상태를 보고, 먼저 4구역으로 향했습니다. 특별한 이유는 없고, 마음이 가는 길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이윽고, 조용하고 한적한 오솔길 끝에 이 천년 가야의 숨결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이 파란 하늘아래 장수의 한복판에, 드넓은 하늘을 다 들일 수 있는 곳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많은 유적이 발굴된 30호분은 그 위엄이 대단했습니다. 

30호분에서는 가야 토기는 물론 철제 마구류 들이 대량 발굴되었으며 특히 등자(말을 오를 때 밟고 오르는 철제 발걸이)와 재갈은 우리나라 극히 일부의 가야유적에서만 발견된 희귀품 이라고 합니다. 이역시 가야 지배층의 무덤이라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30호분을 둘러 보고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니 3구역으로 가는 능선 끝 갈림길이 나왔습니다. 이곳에 올라서니 저 아래 의암공원 ‘장수누리파크’가 한눈에 시원하게 보입니다. 내 발아래 장수 읍내가 모두 닿아 있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 둘러본 조선왕릉과 신라 마지막 왕릉인 임진강변 경순왕릉처럼 이 가야의 고분들도 낮은 산임에도 경관과 조망이 아주 훌륭합니다. 그래서 너무 좋습니다. 이렇게 낮은 산인데도 이렇게 좋은 경치를 구경 할 수 있다는 것도 가야 유적 답사의 큰 장점인 것 같습니다. 온 세상을 다 볼 수 있을 것 같은 경관입니다.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3구역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양지바른 능선 위에 멋진 자태의 19호분이 있었습니다. 이곳이 우리나라서 처음으로 철제 편자가 발굴된 곳입니다. 고고학자들은 미미한 문헌적 자료와 발굴로 역사를 추정하는데 이렇게 새로운 유적과 유물이 나올 때 마다 가슴이 설렌다고 합니다. 

이 고분의 주인은 말을 사랑했던 모양입니다. 말도 함께 순장되었는지 아니면 말과 함께 전장에서 전사하여 말과 함께 묻혔는지 정말 신비롭습니다. 그 말이 신었던 말의 신발 편자와 그의 뼈가 함께 출토되어 정말 더 귀중한 자료가 되었습니다. 말뼈는 전문 조사기관에서 조사하여 유전자 지도를 완성하면 더 자세한 내용이 나온다고 합니다. 이 말은 어디서 왔는지도 아주 중요한 포인트이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발견된 토기는 가야계 토기뿐아니라 백제와 신라, 그리고 중국의 토기도 함께 발견되어 이 고분의 주인과 당시 위치가 세계 여러 나라들과 많은 교류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만일 이곳에서 발견된 말의 DNA가 아라비아 계열이라면 고대 가야의 역사는 새로운 페이지를 장식할것이 분명합니다.

한가지 신기한 점이 있습니다. 이곳에 있는 80여 기의 고분들의 방향이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보통의 무덤들은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게 일반적입니다. 익산 입점리 고분 유적의 무덤들은 북동쪽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 무덤의 주인들이 죽어서도 바라보고 싶은 곳이 동쪽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말년에 동쪽으로 가지 않고 이곳에 묻혀 가고 싶은 곳의 하늘을 보고 누었을까요. 

현재 동촌리 고분군의 발굴 진행은 약 10% 정도 내외입니다. 지난 발굴 성과 보다 앞으로 발굴될 유물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무령왕릉도 다른 큰 능 사이에 비교적 작게 위치해 있어 도굴로부터 보호가 되었듯이 동촌리 고분군들중 어딘가에서 지석이나 목간 등 이들의 신분과 역사를 확인해 줄 유물이 추가로 출토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 장수가야 연구의 새로운 구심점 장수역사전시관 

장수읍에 장수 가야 홍보관이 있다면, 장계 읍내에는 장수역사전시관이 있습니다. 장계 또한 장수 가야 유적의 중심에 있는 한 축이기 때문에 이곳 역시 매우 중요한 위상과 책임이 있는 곳입니다. 문을 연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홍보관과는 또다른 모습과 방식으로 장수 가야를 알리고 있는 시설입니다. 

이곳에도 친절하고 수준 높은 지식을 알려줄 문화 관광 해설사 분들이 상주하고 있습니다. 

장수가야 홍보관이 ‘가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이 곳은 선사시대부터 지금까지의 장수에 대해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입니다. 특히 올해 말까지 장수가야 특별전(삼고리 고분군)이 열리고 있어 장수 가야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꼭 한번 둘러 볼 만한 곳입니다. 

이곳도 역시 2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층에는 멋진 모습의 가야 토기 조형물과 특별전시관이 있고, 2층에는 상설 전시관과 어린이 시설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있는 가족들이 둘러보기 딱 좋습니다. 새로 지어서 그런지 너무 깨끗하고 둘러보기 좋게 디자인 되어 있습니다. 특히 1층에 있는 토기 실물 앞에 서서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가야 토기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2층 상설 전시시설에는 가야는 물론, 선사시대부터 장수 지역이 우리나라 역사에 끼친 영향과 그 위상에 대해 보다 자세히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사진, 영상자료는 물론이고 자세한 설명과 모형을 통해 누구나 쉽게 장수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었습니다. 

2천 년 넘게 숨쉬고 있는 장수가야의 역사 유적을 하루 만에 다 돌아보려는 욕심은 말 그대로 욕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장수역사전시관에 근무하고 있는 직원분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추천받는 곳은 <침령산성>입니다. 장계 읍내에서 걸어서도 갈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있었습니다. 

 

# 깊은 산중의 천혜 요새 침령산성 그리고 마르지 않는 천년 우물  

일단은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정말 장계 장날이었습니다. (3일, 8일) 

인근에서 가장 크고 활기찬 장터를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시장 안으로 들어가 늦은 점심을 아주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리고 부른 배를 이끌고 침령산성으로 가보았습니다. 장계시장 앞에서 침곡교 다리만 건너면 침령산성의 들머리인 사곡마을입니다. 

침령산성(砧嶺山城)의 ‘침’은 다듬이돌 이나 장작을 팰 때 아래 받침으로 쓰는 나무를 뜻합니다. 평평하지만 약간은 살짝 움푹 패인 모양. 고개가 그렇게 생겨서 이름을 지은 것 같습니다.

사곡(梭谷) 마을은 베틀에 있는 ‘북’을 뜻하는 이름으로 이 지역이 베틀 모양을 하고 있어서 그렇다고 합니다. 이곳을 ‘북실’ 이라고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행정구역 명칭으로는 장계면 침곡리 사곡마을입니다. 

이정표에 따라 마을로 들어서면 오른쪽에 오래된 정미소가 보입니다. 지도상에는 ‘침곡정미소’라고 되어 있습니다. 길을 따라 계속 마을로 들어가면 작은 실개천이 나오고 멋진 느티나무가 나오고, 나무를 지나면 더 멋진 느티나무와 마을회관을 지나게 됩니다. 

이렇게 약 2km 정도 마을 길을 따라서 오르면 길 끝에 작은 당집이 보이는데, 이 당집을 만나기 전에 조금 아래 있는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올라야 합니다. 문화재로 지정은 되었지만 아직 많은 사람들이 찾지 않아 그런지 이 부근에서 길을 잘못드는 경우가 많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갈림길 오른쪽 언덕을 올라 바로 왼쪽으로 난 길을 계속 따라 2km 정도 시멘트 포장길을 올라가면 침령산성 입구 차단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주차는 차단기 앞 공터에 하면 됩니다. 차단기 바로 옆은 작지만, 수량이 풍부한 작은 계곡과 더 작은 폭포가 있어서 너무 정겹습니다. 

차에서 내려 걸어서 차단기를 지나 조금 가파른 꼬부랑길이 이어지는데, 힘은 좀 들지만, 포장을 잘해 놓아서 어렵거나 위험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너무 조용한 숲길이라 신비감 마져 느껴집니다. 지금 이 길도 좋긴 하지만 옛길을 조금 더 예스럽게 가다듬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문화재 관련 예산이 많이 삭감되었다는 뉴스를 들었는데 이 정도 가치 있는 곳에서는 예산을 조금 더 많이 배정해서 조금 더 멋지고 자연스럽게 정비를 했으면 더 좋겠습니다.     

포장이 끝나는 지점에서 고개를 들면 왼쪽에 침령(砧嶺)이 보이고 저 앞에 계단길이 보입니다. 

침령은 정말 장작을 하나 든든하게 받쳐 놓을 수 있게 생겼습니다. 계단 길을 오르면 오른쪽에 제법 큰 웅덩이가 보입니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오랫동안 평평하게 다져놓은 집터 같은 곳들이 보입니다. 아마도 그 옛날 산성을 만드는 사람들이나 그 이후 화전민들이 살았을 것 같은 모습입니다. 그 역사는 이 천년 이지만, 아직 그 흔적은 오롯이 남아 있습니다. 

돌 계단길 끝에는 산 아래 전시관에서 사진으로만 보았던 침령산성의 든든한 벽이 보입니다. 천년이 훌쩍 지났지만, 아직도 든든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이곳저곳 보수한 흔적은 있지만 아직도 그 옛날 쌓았던 부분도 많이 남아 있어 깨나 신비스럽습니다. 

산성을 옆에서 보면 위로 올라갈수록 경사가 져서 웬만한 충격이나 진동에도 무너지지 않고 안정적으로 성을 지지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성벽 위 소나무 만이 조용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성벽을 오른쪽으로 돌아 성안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성안에는 깨진 기왓장과 건물의 일부분이었을 것 같은 작은 돌조각들이 많이 보입니다. 약간 허물어진 돌무덤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습니다. 산의 정상부인데 참 포근하고 아늑해 보입니다. 이 성은 처음에 누가 언제 어떻게 쌓게 되었는지 그저 신비할 뿐입니다. 그 옛날 어떻게 이렇게 크고 아름다운 건축을 할 수 있었을지 너무 신기합니다. 

성안 이곳저곳에 발굴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집터도 있고, 운동장 같은 곳도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들어가니 정말 사진으로 보았던 그 우물이 보였습니다. 발굴 당시에는 물을 퍼냈지만, 지금은 물이 가득 고여 있습니다. 지형을 자연 그대로 이용해 이천년 동안 정말 자연스럽게 마르지 않고 있는 우물입니다.

우물은 하나가 아닙니다. 여러 개입니다. 그 옛날 이곳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얼마나 중요한 요충지였으면 어떻게 이렇게 크고 훌륭한 우물이 여러 개가 되었을까요. 이곳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철제 도르래가 발견되었는데 지금 쓰는 도르래와 별 차이가 없는 훌륭한 품질과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성안을 둘러보는데 누구의 무덤도 있습니다. 왠지 이 성을 지었거나 관계했던 인물들의 무덤이 아닐까 합니다. 일반적으로 무덤은 땅이 습한 곳에는 쓰지 않는데 이곳에 무덤이 있다는 것은 이 성과 아주 가까운 관계였던 것같습니다. 이 무덤들은 성안 양지바르고 전망 좋은 곳에 터를 잡고 있습니다. 

성안을 한 바퀴 둘러보고 나와 다시 그 성벽 아래 섰습니다, 한참을 보고 서 있었습니다. 보면 볼수록 신기하고 신비로운 2천 년 전 성입니다. 이 성의 주인은 누구였을까요. 지금도 이 산 아래 고속도로가 지나는 터널이 있는 것을 보면 이곳이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했던 곳인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성을 나와 내려오는길. 머리는 맑아졌지만, 생각도 더 많아졌습니다.

장수가야는 철기 산업 덕에 부와 권력을 누렸을 것이고, 일대에 강력한 존재였을 텐데 어떻게 기록 한 줄 남아 있지 않은 것일까요. 철제 무기나 마구류등으로 무장했던 가야의 기마무사는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정교한 철제 공구는 남들보다 더 크고 멋지고 튼튼한 배와 건축물을 만들 수 있고 돌덩이를 가공하여 석축도 쌓고 탑도 쌓았을 것 같습니다. 또한 생활용품에도 많이 적용되어 어쩌면 우리나라 음식문화의 중심이 전북이 되었을 것도 같습니다. 좋은 칼이나 가위, 다양한 철기 조리도구가 일찍부터 사용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원과 장수의 목기도 좋은 철제 공구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아직, 장수 읍내엔 가야와 철기 문명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그 옛날의 감성이 피에서 피로 전달되어 지금 장수사람들의 DNA에 그대로 남아 있는 듯 합니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고고학적 발굴은 공식적인 발굴과 학자나 연구가들의 공적이지만, 우연에 의해 발견된 것들이 참 많습니다. 

양피지에 적힌 성경, 배수로를 파내다 발견된 무령왕릉 등등... 어쩌면 이천년 가야 역사의 실마리를 풀 수 있는 위대한 발견이 이번 주말 산과 들을 다니는 우리들 발끝에 걸릴지 모르겠습니다. 가야역사의 신비가 쉽고 가볍게 풀릴 순간이 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전북도 블로그기자단 '전북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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