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기고

채성석 전북친환경생산자연합회 정책위원장

생명의 밥상을 누군가에게 차려 올려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81년 1월 17일 막내 삼촌이 장가가는 날, 저는 동네 샘에서 물을 길어오는 일을 맡았습니다.

점심 때까지 17번을 양철통 물지게로 날랐는데 눈이 많이 내려 발은 미끄럽고 어찌나 배가 고프던지 밥 여섯 그릇을 비웠던 “밥”에 대한 고마움을 기억합니다.

저녁 늦은 무렵 어머니, 아버지가 맛있는 것을 집어 서로의 입에 넣어주는 것으로 잔치를 장식했지요. 동네 분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서 말입니다.

분명 어머니의 밥상이요. 마을 모두의 공동체 밥상이었습니다. 그 후로도 잔치는 많았지만 어깨춤이 덩실 추어지던 생명의 밥상이 차려지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암울의 극치를 이루는 서슬 퍼런 시절이었는데도 정이 활활 타오르는 그 무엇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추측해봅니다.

 생명의 밥상을 모든 이들에게 차려 올릴 만큼은 된 세상이기도 싶은데, 석연치 않은 이유는 밥상을 차리기는 쉬워졌으나 그 일이 남이 하는 일이요, 장사하는 것이 되어버려 가치가 바뀌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의 밥상을 차릴 줄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을 진정으로 귀하게 보는 눈과 마음이 있을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다채롭고 변화무쌍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알아보고 이를  지속가능케 할 능력이 사람 모두에게 잠재돼있습니다.

그런 고급 생명체인 사람에게 밥상은 생명이요, 부활의 에너지인 것입니다. 생명밥상의 자실거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 친환경 농사이니 자연과 하나 되어야 가능한 일이며 “농사는 하늘과 땅의 모든 바탕”이 됩니다.

한 사람의 건강한 행복도, 한 나라의 조화로운 행복도 사실은 이 생명의 밥상이 안전하게 보장되어 질 때 가능해집니다. 그것이 농업의 중요성이자 가장 소중한 정치의 기본인 것입니다.

등 따숩고 배부르면 삶은 기본은 이루어진 것입니다. 헌데 요즘의 도회지는 먹을 것으로 넘쳐 난다고하니 아마 못 먹을 것을 먹을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그 만큼 병이 늘어나고 병원이 많아졌을 것입니다.  자라나는 아이와 학생을 두신 젊은 엄마 아빠께, 예쁜 손녀 손자를 두신 할아버지 할머니께 부탁을 드립니다.

제발 생명의 자실거리로 차린 밥상이 아니면 그 누구에게라도 차리지 말 것이며 특히 어린이와 학생들께는 절대로 생명의 밥상만을 차려 주십시오. FTA 발효 후 건강과 직결되는 가장 기본인 식품체계의 어느 것 하나 규제할 수 없으니 오직 믿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어머니 당신입니다.

가짜 어머니가 아닌 진짜 어머니가 되어 주셔야만 아이들의 미래가 있을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올곧은 생명의 밥상을 차리는 것이 마땅한 일 아니겠습니까. 한 아이가 온전하게 되면 곧 마을과 지역 온 나라가 온전하게 되는 이치를 이루어 냅니다.

그래서 공공급식의 실현은 얼이 가득한 어른이 얼이 아직 여물지 않은 후손들에게 생명의 밥상으로 그 몸과 영혼을 살찌우고 뜨거운 피가 샘솟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의 실천이라고 말해드리고 싶습니다. 수만의 여성보다 단 한분의 성스럽고 아름다운 어머니가 그리워집니다. 이 땅위의 모든 분들이 그런 어머니가 되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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