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대학 4학년이었던 1980년에 봄은 잔인했습니다.
1980년 초에 민족의 비극인 광주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수시로 휴업을 하던 대학이 무기한 폐업으로 들어갔습니다. 기약 없이 낙향합니다.
고향집 건너편의 국제사라는 전파사에서는 때마침 하루 종일 조용필 1집을 틀어댔습니다.
‘뿅~뿅~뿅~‘의 전자 소리로 시작된 “단발머리”는 파블로프의 개의 실험처럼 지금도 그 시절의 조용필로 데려가 현재까지도 조용필의 노래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조용필 노래의 가사는 다분히 철학적입니다.
“찰나”에서는 “우리가 처음 마주친 순간/내게 들어온 떨림/그때는 뭔지 나는 몰랐어/(중략)/결정적인 찰나/반짝이던 찰나”로 우연한 만남을 노래했는데 사실 순간(瞬間)은 ‘눈 깜빡일 순‘으로 0.013초를 뜻합니다.
찰나(刹那)가 산스크리스트어의 크샤나, 순간의 음역입니다. 첫눈에 반하는 것이 바로 순식간, 결정적인 찰나 즉, 운명을 노래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가가려고 “아직은 사랑은 몰라/그래도 우리는 좋아 좋아/(중략)/하지만 나는 너 좋아/사랑일지도 몰라”(나는 너 좋아)라고 표현도 해봅니다.
그러다가 헤어지게 된 사랑한테는 “가지 말라고 가지 말라고/애원하며 잡았었는데/돌아서던 그 사람은/무정했던 당신이지요/가지 말라고 가지 말라고”(잊혀진 사랑)라고 울부짖기도 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만남과 이별, 애별리고(愛別離苦)를 “나는 떠난 사람들과/만나게 될 또 다른 사람들/스쳐가는 인연과 그리움은/어느 곳으로 가는 가/(중략)/이제 그 해답이 사랑이라면/나는 이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겠네“(바람의 노래)라고 결국 사랑만이 해답이라고 얘기합니다.
나이가 들면서 직장을 찾아 현실을 찾아 도시로 떠납니다. 고향을 등지고 빌딩 숲으로 “꿈“을 찾아 떠납니다.
그러다가 뜨거운 눈물의 고난을 겪습니다. 뜨거운 눈물을 머금고 하늘을 봅니다.
하늘의 별 보고 ”저기 저 별은 나의 마음 알까/나의 꿈을 알까/괴로울 땐 슬픈 노래를 부른다/슬퍼질 땐 차라리/나 홀로 눈을 감고 싶어“(꿈)을 부르면서 고향 생각을 합니다.
스님들은 새벽에 범종을 칩니다. 어떤 스님이 얼마나 피곤했던지 한 번 치고 순간 잠에 빠져 꿈을 꿉니다.
아랫마을 예쁜 처자하고 결혼하고 아들 7명을 낳아서 대감도 시키고 큰 부자가 됐는데 갑자기 망하게 되면서 꿈을 깹니다.
그런데 바로 쳤던 종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선사가 깨닫습니다. 인간의 생이 꿈이고 찰나인 것을....
조용필은 1970년대 말 대마초 사건의 연루돼 낙담하고 있을 때 통도사 극락암의 경봉스님을 찾아갑니다.
많은 대화 후에 경봉스님이 조용필보고 ‘너는 꾀꼬리다. 그러니 꾀꼬리를 찾아와 보거라’ 했습니다.
결국 찾지는 못하고 이렇게 노래했죠. “그 많던 어린 날의 꿈이 숨어 버려/잃어버린 꿈을 찾아 헤매는 술래야/못 찾겠다 꾀꼬리”(못 찾겠다 꾀꼬리). 아직도 그 꾀꼬리를 찾았다는 소식은 못 들었습니다.
이렇듯 앞만 보고 달려왔던 질풍노도와도 같은 젊은 시절은 어딜 찾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 길에 힘이 겨워도/또 안 된다고 말해도/이제는 믿어봐/자신을 믿어 봐”(그래도 돼)라고 “내 어깨 위를 누른 삶의 무게를” 견뎌가면서 지금도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왕 조용필의 노래에는 꿈·허공·찰나·순간·사랑·기쁨·영원 등의 깨달음에 관한 단어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그대 발길이 머무는 곳에”에서는 “지금 내 곁에 있는 모든 것들이/정녕 기쁨이 되게 하여 주오/그리고 사랑의 그림자 되어/끝없이 머물게 하여 주오/그리고 사랑의 그림자 되어/끝없이 머물게 하여 주오/한순간 스쳐가는 그 세월을/내 곁에 머물게 하여 주오/꿈이 꿈으로 끝나지 않을/사랑은 영원히 남아/언제나 내 곁에”라고 노래했나봅니다.
가왕 조용필은 지난 40여 년 동안 우리 국민들에게 많은 힘과 꿈과 사랑과 용기를 줬습니다.
올 추석 KBS-2TV에서 방영됐던 “광복80주년 대기획-조용필, 이 순간을 영원히”에서는 우리 국민의 대통합을 보여줬습니다.
역시 가왕답습니다.
/강길선 전북대학교 교수 (고분자나노공학과)
